朝鮮 科試의 箴銘頌 硏究

  •   이 논문은 조선 시대 科試에서 科文六體 다음으로 비중이 높은 箴銘頌 세 문체에 대해 전반적으로 점검하여 그 역사적 의미를 考究하였다.

      잠명송은 조선 시대 법전에 文科 初試 및 殿試, 進士試 初試에 출제할 수 있다고 규정되어 있었으나 문과 초시 및 진사시 초시에서는 전혀 출제되지 않았고, 현전 자료는 모두 문과 전시에서 출제된 것들이다. 잠명송의 출제와 관련해서는 주로 조선 후기에 다양한 논의들이 제출되었는데, 잠명송의 난이도와 관련하여 합격자를 다양화(주로 鄕儒에 대한 배려)하고, 역량 있는 인재를 선발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다양한 文體를 출제하자는 주장과 함께 그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특히 肅宗 年間에는 과시 출제가 四六文에 집중된 점이 비판받으면서 잠명송 출제의 필요성이 제기된 점이 특징적이었으나, 잠명송이 분량이 짧아 짓기가 상대적으로 쉽고 이로 인해 역량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요행으로 합격하는 사람들이 발생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여러 주장들이 제기되었다.

      조선 과시에서 출제되었던 잠명송의 문제 사례를 종합하여 통계를 내 보면 우선 조선 후기로 갈수록 잠명송의 출제 비중이 커져 갔던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는 과시 출제 문체의 다양화라는 내적 요인과 함께, 제도의 문란이라는 조선 후기의 사회적 문제점이 요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잠명송 자체로 보면 잠명송의 출제 비율은 시기에 따라 頌→箴→銘의 순서로 유행하였고, 송과 잠의 경우에는 비정기 과시에 주로 출제되는 양상을 보였다. 전체 비율을 따져 보면 명이 과반을 차지하여 출제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특히 명은 궁중 건물을 주제로 자주 출제되었고 중복 출제도 적지 않게 이루어지는 등, 조선 후기 과거제도가 점차 무너져 가던 상황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서 의미가 있다.


  • 한문고전연구 45 ∥ 한국한문고전학회 ∥ 2022 ∥ pp.187-209